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Give the LORD no rest until he makes Jerusalem the object of praise throughout the earth.

이사야 62:7

 
작성일 : 12-12-20 16:16
(1)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독교세계관 운동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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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독교세계관 운동 (1)

                                                                                                 김현진 목사 (사귐의 공동체 대표)

구속사는 세속사의 중심이며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통로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문제는 바로 교회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문제의 해결점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세상과 동반자적으로 부패해 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고 의도하신 교회가 어떠한 교회였는지 교회의 본질을 먼저 살펴보고 이 본질적인 교회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세계관 운동이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교회의 본질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통'(Communio Sanctorum, the Communion of Saints)이2다. 성도의 교통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고백했던 용어였으며, 16세기 종교 개혁가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자 했을 때 그들도 역시 '교회란 성도의 교통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성도의 교통'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하나 된 몸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체란 교회의 본질이다.

교회의 본질로서 성도의 교통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수평적으로는 성도들 간에 서로 하나되어 교제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 성도의 교통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삼차원의 코이노니아

코이노니아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를 교제(koinonia)케 하시고, 성도들 간에 서로 영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교제케 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도들끼리만 아니라 교회 밖의 고통당하는 이웃과도 교제토록 하셔서 더불어 함께 살도록 하신다. 즉 성령은 수직적 코이노니아, 수평적 코이노니아,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의 삼차원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신다. 이 삼차원의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는 것이 본질적 교회이며 온전한 공동체이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시작된 신약교회의 공동체 됨은 단순히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이며 전 생활적인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세례를 받자마자 속사람이 변하여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으며 자원해서 물질을 나눔으로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행 4:34). 이뿐 아니라 대사회적으로는 고통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함으로써 온 백성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즉 초대교회의 '성도의 교통'은 결코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제적으로 보여질 수 있는 '가시적인 공동체성'(可視的 共同體性)이었다. 교회의 핵심은 온전한 교제(Koinonia)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부패한 심령에 오셔서 하나님과 '온전한 하나됨'(oneness)을 이루신다.

성도들 간의 수평적인 코이노니아에는 영적인 교제, 정신적인 교제, 그리고 물질적인 교제의 세 차원이 있다. 영적인 교제는 성도들 간에 기도로서 영교하는 것과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는 것이다(요일 1:3, 빌 1:4). 정신적인 교제는 지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서로 위로, 권면, 격려하는 태도로서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 지체를 세워주는 정신적인 차원의 교제(빌 2:1-2, 고전 12:26, 롬 12:15), 그리고 지체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말로서만이 아니라 필요한 물질로 채워줌으로써 한 몸의 삶을 실제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물질적인 교제가 있다.

"믿는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으로써 가난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행 2:44-45, 4:32)라는 사실은 물질적인 교제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원래 코이노니아라는 헬라어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할 때 쓰는 상업적인 단어였으며, 또한 친척이 아닌 '직계 가족'의 관계를 나타낼 때 쓰였던 단어였다. 물질을 공동소유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은 가족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교회란 이렇듯 '예수 새가족'(Jesus new family)이다. 진정한 코이노니아는 영적, 정신적인 교제만 아니라 필요한 물질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는 집단 이기주의를 쫒아 예수믿는 자들끼리만 아름답게 삶을 나누는 집단 이기주의적인 교제가 아니다. 온전한 코이노니아는 기독교인들의 울타리를 벗어나 지역사회 속에 있는 고통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삶을 같이하는 영역을 포함한다. 코이노니아의 더욱 깊은 신학적인 의미는 구약 희년의 신약적 구현이라는 것이다. 구약의 희년은 50년마다 땅과 집과 몸에게 자유를 선포하여 토지반환, 노예해방, 부채탕감이 되게 함으로써 토지독점으로 인한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영구적 부익부 빈익빈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경제법이었다.

예수님은 눅 4;18-19에서 새로운 희년(은혜의 해)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결과 코이노니아의 역사를 통한 교회공동체의 자원적인 나눔과 섬김으로 지역사회 안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들을 다 담당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하여 이뤄지는 새로운 차원의 희년(자원의 희년)이다. 구약의 희년은 신약에서 코이노니아로 대체된다. 즉 교회라는 공동체는 구약 희년의 의미를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통하여 지역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기관이다.

공동체성이란 교회 내적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영적, 정신적인 교제만 아니라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교제를 실천하여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는 것이고, 교회 밖으로는 주위의 필요를 채우면서 고통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초대교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나그네가 있으면 집으로 영접하여 돌봐주었으며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그를 돕기 위해 그들은 이삼일은 금식하였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대사회적인 코이노니아가 실제로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것을 교부들은 전해준다. 이러한 구제는 곧 사회에게 영향력을 주는 사회 선교의 발판이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연속성

성령 강림으로 형성된 초대교회 공동체는 신약 최초의 공동체였고 모든 공동체의 전형이었다. 이러한 온전한 코이노니아를 통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 됨에도 불구하고 늘 제기되는 의문은 과연 초대교회 의 공동체 생활 형태가 계속 지속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령이 최초로 강림하심으로 가능한 일시적인 공동체였으므로 잠시 후 성경에서 곧 사라졌으며, 그것이 소비적인 공동체였으므로 발전된 현대교회의 본보기가 될 수 없다는 신학적인 반론이 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사도행전 2장과 4장 이후에도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사가 여러 방면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초대교회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는 획기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행 2: 37-47).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강림 후 개인의 소유형태는 여전하였지만 소유에 대한 의미와 태도가 변화되었다. 성도들은 재산을 소유하되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동 소유(common ownership)'의 형태로 바뀌었다(행 2:42-47). 그것은 소유를 자발적으로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태도의 변화였다. 이것은 최초의 강력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돌발적이고 일시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후 계속 실행된 것이었다. 사도행전 4장 32-35에서는 이러한 공동소유의 실천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 공동소유의 실례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만 실천된 것이 아니라 신약의 여러 교회에서도 계속 실행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고 손 대접하기를 힘써라"(롬 12:13)고 말한다. 여기서 '공급하다'는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코이노니아 즉 공동소유를 실행하라"는 말이다. 즉 필요하다면 내 것도 그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공동 소유의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던 공동소유의 형태가 로마 교회에서도 일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동소유적 삶의 확장은 마케도니아 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마케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어려움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그들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연보하여 지체들을 섬기는 일에 참여(koinonia)한 경우에서 나타난다(고후 8:1-14). 연보는 "유여한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한다"(고후 8:14)는 것이다. 이 연보란 바로 '코이노니아'의 정신이었다. 연보는 단순히 예배시의 헌금이 아니라 초대교회 공동체 삶에서 '물질적인 교제'를 실천하는 구체적 방식이었다. 즉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유무상통하던 습관은 교회의 박해와 여러 지역으로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한곳에서 '共有'하던 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지역교회 간의 형제애적 '共用'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바울의 서신서에는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 삶이 그후에도 작은 가정교회 공동체의 형태로 계속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는 유대인들의 심한 박해로 인해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원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는 두세 가정이 작은 한 단위가 되어 서로 자연스럽게 전인적인 코이노니아를 실천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성전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행 2:42-47).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적 섭리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나자 그 당시 그러한 공동체적 삶을 살고 있던 일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가지고 세계 각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행 6:1-3). 성도들은 흩어진 장소에서 몇몇 가정들이 뭉쳐 작은 공동체들을 형성하여 가정교회의 역할을 해 나갔으며 코이노니아의 삶을 통하여 이웃을 섬기는 빛과 소금의 삶으로 영향력 있는 선교사역을 해 나갔었다. 이 작은 단위의 공동체들은 후에 바울의 선교 거점이 되었다. 바울이 선교 거점으로 사용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란 바로 이러한 평신도들의 작은 공동체의 한 예이다.

바울의 신앙 변증서인 로마서(16:5)에서도 바울은 로마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언급하고 있고 이외에 골로새서(4:15)와 빌레몬서(2절)에서는 라오디게아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와 골로새 지방에 있는 가정교회 형태의 작은 공동체들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의 서신서는 그러한 작은 공동체들이 로마 제국 전역에 두루 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초대교회의 복음이 로마의 압제 속에서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능력의 역사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삶으로 보여주는 복음이 그 요인이었다. 그들의 공동체 삶은 공동소유만 아니라 지체의식과 형제애, 그리고 서로 간의 자발적인 섬김이 있었다. 사도 바울 시대 이후에 들어서서 교부 저스틴(Justin Martyr)은 그의 저술 <변증>(Apology)에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라, 저들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라는 유행어가 붙여졌다고 전해준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하의 각 지역에서도 공동체적 삶을 계속 유지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스틴은 또한 당시 성도들의 공동체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무엇보다도 부와 소유의 획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우리들이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 내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공동소유하고 있다. 서로 미워하고 죽이고 하면서 우리의 동족이 아닌 사람들과는 생활습관이 달라서 한번도 공동 유대를 이뤄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후로 이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산다."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면모를 보여주는 형제 관계는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에 계속 살아 있었다. 바울의 경우 '성도들'이란 서로 돌아보는 형제애를 가진 '공동체'의 동의어였다(롬 1:7; 16:15; 고전 1:2; 빌 1:1; 4:22). 저스틴은 이러한 '성도들' 의 삶을 또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부유한 자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헌납을 하고, 그렇게 모인 것이 성찬식 집행자에게 전달되어 고아와 과부들, 병이나 그밖에 이유로 빈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옥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공동체에 속해 있는 포로된 사람들이나 나그네들을 찾아가서 도와준다."

이러한 코이노니아는 지역교회 내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른 지방의 교회들도 도움으로써 지체된 형제애를 실천하였다. 170년경 고린도 교회의 디오니시우스(Dionicius) 감독이 로마 교회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부터 여러분들은 모든 형제들을 여러 가지로 돕고 모든 도시에 수많은 원조를 보내주었다. 예로부터 여러분이 보내 온 선물들을 통하여 여러분은 로마인으로서 전래의 로마교회의 관습을 고수하여 궁핍한 사람들의 가난을 덜어주고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고, 이것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은 그곳의 교회 성도들의 공동체적 섬김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의 형제들은 대부분이 넘치는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서로 의지하여 두려움이 없이 병자들을 데려와 세심하게 보살피고 그리스도 안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병자들과 똑같이 지극히 기쁜 마음으로 죽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앓는 병에 전염되면서, 다른 사람의 병에 자기도 걸리면서, 자발적으로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면서... 이렇게 해서 우리 형제들은 가장 건강한 사람들까지도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들은 성도들의 몸을 품에 안아 눈을 감겨 주고 입을 닫아 주며 어깨에 메고 가서 진심으로 얼싸안고 몸을 씻기며 옷을 입힌 다음 장례를 치렀기에, 그들도 얼마 안가서 똑같은 시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이때에 살아 남은 사람들이 또 언제나 먼저 간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꺼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기독교를 변증했던 아리스티데스(Aristides)도 당시 성도들의 공동체적 섬김의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한다. 과부들에게서 그냥 돌아서는 일이 없다. 고아들을 혹독하게 다루는 사람들로부터 구해 내며, 외인들을 보면 집으로 영접하여 형제처럼 대우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난 형제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또한 가난한 자가 죽게 되면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 한도 내에서 그의 장례를 부담한다. 그리고 만약에 그들의 메시야 때문에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옥에 갇히거나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들 모두가 그의 필요를 채워 주고 될 수 있으면 그를 풀려나게 해 준다. 그리고 그들 중에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과 양식이 없는 자가 있으면 그들은 그를 돕기 위해 이틀이나 삼일을 금식한다."
 
교부 오리겐(Origenus)은 이러한 생명력 있는 공동체들이 소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서 세속사회 속에서 복음을 권능 있게 증거하고 있음을 증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이러한 공동체들을 일으키시어 미신과 무례와 불의에 젖은 인간들의 공동체들에 대항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스승과 교육자가 되어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들은 그들의 세속적인 공동체들에 비하여 '세상 안에서 하늘의 등불'처럼 그들 속에서 낯선 사람들로서 살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특정지역에 분리해서 게토(ghetto)화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사회속에서 보편적인 모습으로 살면서도 공동체적 삶을 살아갔고 그들의 공동체적 삶의 내용이 산상수훈적인 삶과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해 나갔다. 극진한 형제애와 지체의식, 그리고 물질까지 자원해서 나누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삶은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만 아니라 교부 시대에도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에 계속해서 실행되고 있었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공동체 삶은 성령강림으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지하 교회가 공인되기 전까지 계속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도 예루살렘 공동체처럼 유무상통을 하면서 많은 인원이 함께 공동생활을 하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많이 있다.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후터형제회와 메노나이트 공동체들,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등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공동체를 성경적 근거로 해서 이룩된 예이다. 즉 초기 예루살렘의 대규모의 공동체는 박해로 해체되어 다른 형태로 계속 발전했으나, 만약 철저하게 실천하고자 한다면 성령의 동일한 역사로 현대에서도 예루살렘 공동체와 같은 형태는 실제로 가능한 것이다. 그외에도 공동생활은 하지 않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코이노니아의 본질을 구현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교회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본질인 성도의 교통, 코이노니아가 공동체 삶을 통해 초대교회 이후 약 300여 년간 지속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현대교회에는 그러한 초대교회의 사랑의 공동체 삶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것인가?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지하교회가 지상교회로 바뀌면서 교회 내에서 세속적인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이러한 나눔의 공동체적인 삶을 싫어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공인을 되고 난 뒤부터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적 정절이 약화되면서 교회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모습은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교회의 본질인 그러한 공동체적 삶은 단절되어 버렸으며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가 되어 버렸다.

교회사의 공동체 운동들

그후 제도권 교회가 상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본질을 찾기 원했던 뜻있는 성도들은 이름도 없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매세기마다 끊임없이 나타났다. 2세기에는 성 안토니우스와 파코미우스의 공동체 시도가 있었고 5세기에는 훌륭한 신앙선배들의 공동체가 정통교회에 의해서 수도원화 되었다. 7세기에 들어서 수도원 공동체들이 부패하게 되자 성 프란시스코, 도미니크 수도회를 통한 수도원 개혁운동이 일어나 진정한 복음의 본질 회복을 촉구했다. 12세기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평신도 교회갱신 운동단체인 왈도파, 14세기 네덜란드의 공동생활 형제단을 통한 교회개혁의 움직임인 Devotio Moderna운동(오늘의 헌신이란 뜻), 16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과 더불어 보다 철저한 교회개혁을 천명한 재세례파의 공동체 생활, 18세기 모라비아 지방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헤른후트 선교공동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대부분의 선교회들이 공동체 바탕을 두고 효과적이고 활발한 사역을 펼쳤다.
 
 현세기에 와서는 보다 본질적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기독교 공동체 시도가 급증하고 있다. 2차대전 후 나타난 세계의 대표적인 기독교 공동체는 교파와 교회간의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프랑스 떼제공동체, 강력한 영적 각성을 통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개신교 여성독신 공동체인 독일의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 성령의 능력과 자비량 선교를 통한 선교공동체인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고독과 소외의식이 만연한 대도시 속에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랑의 공동체인 시카고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 미국 남부 흑인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코이노니아 동역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성경 진리의 온전성을 증거하는 라브리 공동체 등이 있다.

템플대학교의 F. 릿텔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 공동체들이 추구하는 바에 대하여 '참된 교회의 회복'이라고 했으며 해롤드 벤더 교수는 '철저한 제자도의 삶'으로 보았다. 결국 기독교 공동체 운동은 어떤 특정한 생활양식이 아니라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추구하는 데 그 의도가 있다. 도날드 블뢰쉬는 "기독교 공동체는 기성교회에게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교회가 어떻해야 하는가를 깨우쳐 준다."고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우리의 기존 교회가 상실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균형'잡는 역할을 해 주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꾸준히 공동체 사역이 진행되어 왔다. 많은 교회들이 공동체교회를 시도하고 있으며 민중교회들도 신학적인 입장과 강조점이 다소 다르지만 역시 공동체적인 교회를 실험하고 있다. 교파가 다른 교회들도 공동체라는 교회의 본질에서 함께 만나고 일치를 도모하게 된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교회의 주요한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표시'이다.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지 우선 그 일반적인 개념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the reign of God)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임박성에 따라 미래적 하나님 나라와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 구분된다.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장차 하늘 나라에 가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며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 땅에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다. 전자를 '종말론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하며 후자는 '천국의 현재적 개시'라고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을까 하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공동체를 다루고자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떠한 관계인가? 조지 래드(George Ladd)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교회는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래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 기관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지만 교회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있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도구이며 대리 기관(agent)이라는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의 사신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화해의 뜻을 이루시는 최상의 수단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교회는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며, 현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둘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형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자.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계 21:1-5), 눈물과 고통과 죄와 사망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된 나라(계 21:4-5),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휘황 찬란하게 빛나는 나라인 새 예루살렘(계 21:10-27),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왕 노릇(통치) 하는 나라(계 22:1-5)이다. 미래에 완성될 천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서 새로운 영토(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회복(죄와 사망의 문제 해결), 새로운 통치(하나님과 영원히 왕 노릇 함)이다.
아름답고 권능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온 세상을 회복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즉 지금 여기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그러면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고(마 3:2; 막 1:1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요 3:1-5) 복음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눅 17:21).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시 22:3).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고(눅 11:20) 또한 어린아이 같은 겸손함과 단순한 믿음(마 18:1-5), 헌신과 충성, 낮아지고, 주고, 버려지는 섬김의 삶(마 19:13-30), 가난한 자와 나누는 공의의 삶(막 10:21-23; 눅 18:22-24), 온전한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천국의 헌장인 산상수훈(마 5-7장)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통하여 나타나는가를 총괄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 법으로서의 제자도이다. 그 제자도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를 가리킨다. 이 제자도는 인간으로서는 지키기가 매우 힘든 명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졌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의 역사를 물리치는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었고, 또한 물질까지 온전히 나누어 가난한 자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감으로써 예수님이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실천하였다.

이 제자도는 개인적으로 지키고자 할 때는 거의 불가능한 윤리 같지만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힘을 합하여 한 몸 안에서 공동체로 지키고자 할 때는 산상수훈이란 실천 가능한 윤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이다. 마태복음의 여덟 가지 복은 세상 사람들의 사회 가치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형태를 규정지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제자도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성령 강림 이전에는 주로 예수님 한 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받은 사람들'의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보여졌다. 성령이 임함으로써 초대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풀고 모든 물질을 온전히 나누어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기적인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탐욕을 떨치고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지경까지 간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사의 혁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된 실체의 증거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통로라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능력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즉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한 온전한 공동체로 회복될 때 하나님 나라가 기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 보여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2:28-31).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 4:12)"고 말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보여 주는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 삶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 임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산상수훈을 실천하고 물질까지 전적으로 포기하고 나눌 수 있는 '철저한' 공동체여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철저한 제자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철저한 공동체의 모본이다.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은 재세례파 공동체인 후터 형제회(Hutterian Brethren)의 삶을 언급하면서 "산상수훈과 무조건적인 제자도, 제자도와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 생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주와 구라파에 있는 후터 형제회를 방문해 보면 역시 몰트만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후터 형제회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방식대로 재산을 공유하며 신실한 형제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로 지금도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후터 형제회는 종교개혁 이래 현재까지 5백여 년 동안 존속해 왔다.

금세기의 위대한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박사는 인도 남부에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여사가 세운 도나버 공동체(Dohnaver Fellowship)에 대하여 "만일 이 지구상에 천국(the kingdom of God)이 있다면, 아마 그곳은 이곳 도나버 공동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나버 공동체는 사회 봉사와 함께 선교를 하는 공동체로서 힌두교 사원에 창녀로 팔려 간 소녀들을 교화시키는 사역을 했었다. 원래 CEZMS(영국성공회 제나나 선교회) 소속이던 이 선교단체는 자라면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모든 회원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소유(all things in common)'하며 '믿음의 선교(faith mission)' 방식을 취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외국에서 온 요원들과 인도 요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all one in Christ)'가 되었으며 계급이나 서열, 국적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없는 사랑과 포용의 분위기가 가득한 사랑의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정녕 하나님 나라의 삶이 구현된 실재를 접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은 여호와께서 영생의 복을 명하는 삶'이라고 노래했다(시 133:1-3).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이 구현될 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 선재(先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차 다가올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단편적으로나마 미리 이곳에서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라고 기도한다. 어떻게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가?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생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통로이다. 공동체 생활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삶의 방식(life style)이다. 이것이 교회 됨의 의미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실제로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실재(visible reality)'이며,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열린 창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공동체 생활, 즉 한곳에 모여 재산을 공유하며 사는 그러한 공동체 생활 형태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하는 통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보편 교회의 형태와 삶 속에서도 그의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체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철저성'이다. 보편 교회에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나타나려면 제자도와 공동체성이 보다 '철저(radical)'하게 실천되어야 하며 보다 격상된 헌신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의미는 단순히 함께 모여 사는 집단이 아니라 철저한 제자도와 깊은 형제애적 삶의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제자도는 물질까지 완전히 나누어 형제애적 사랑을 실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의 필요에 동참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실제적인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떠한 교회를 통하여 그 나라가 구현되는가? 교회의 본질이 실천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공동체 됨이었다. 개인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다. 참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온전한 공동체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성이 철저히 구현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다. 철저하지 않으면 처절하게 된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는 철저한 공동체의 실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하며, 미래에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보여 주는 대안적 사회(alternative society)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절정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 안에 있으니 곧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된 그러한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는 경우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영토(영역)'냐 혹은 '통치'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종래의 주장은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이 아니라 '통치'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앞서 미래에 새롭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천국)의 특징이 '새로운 영토, 새로운 회복, 새로운 통치'임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다면 미래의 세 가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이 땅에서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장소적인 영역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은 하나님의 통치에 종점을 두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영역적 의미보다 주권적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구체성이 결여된 막연한 개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통치는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통치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 구체적인 영역을 통해서 나타난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이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너무 치중했었기에 통치의 영역인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적 의미만 아니라 영역적인 의미에서도 균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인 개념이 약화된 것은 종래의 신학적 영향도 있었다.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교회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가 전 세계에 있는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들과 그러한 공동체성을 온전히 지닌 교회들을 접해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에도 가시적으로 임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란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고 개념적이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막연한 관념적인 하나님 나라가 되기 십상이다. 진실로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도 임재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과 영역의 개념이 균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할 때 균형잡힌 하나님 나라론이 확립될 것이다. 막연한 통치 개념으로서의 실재가 없는 하나님 나라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항상 이 땅 위에서 눈에 보이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현대 교회의 비극 중의 하나는 현재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접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성경 해석이 대개 영해(靈解)되는 쪽으로 흐르거나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에 관념적인 기독교로 정체되어 나중에는 체념적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다. 교회의 삶속에 하나님 나라가 보여져야 한다.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기독교는 체념적인 기독교로 전락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성이 보다 실제적으로 가시적으로 철저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이다.
요즈음 기독교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기독교 세계관은 일상적인 세계관과 달리 하나님 편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세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세계관 혹은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의 틀을 가진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뒤 저 세상에서 펼쳐지는 천국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 공동체 삶이다.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도 밝혔듯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 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교회 내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 속에서 조명하여 확대해 나가게 하는데 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은 학문적이고 사변적인 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기독교 세계관 책 저술, 강연, 세미나, 스터디 수준에 그치고 만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이 사회 전 영역을 다스린다면 그것이 옳음을 밝혀 내는 것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 가능함을 실제 삶으로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론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실천될 수도 있지 않는가?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박식한 이론만을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 이원론에 매여 있다. 삶과 괴리된 세계관 지식이 문제이다. 신약 성경의 구조를 묵상해 보면 왜 하나님이 바울을 예수님의 12제자 군에 미리 부르지 않고 나중에 부르셨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비교적 학문과 이론에 무식한 12제자들이 먼저 '행' 한 후에 그것을 바울이 나중에 학문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 1:1) 기독교 세계관이 어떠하다고 이론은 박식하게 늘어놓으면서 그 세계관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이원론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말'에 지친 종교가 되어 버렸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를 확인하고 증명할 삶의 현장이 없다는 것이다. 예배시 수많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그 설교가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실천의 생활은 보기 힘들게 되고 선포된 말씀이 실제로 실천되지 않고, 또한 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말씀의 능력은 상실된다. 기독교의 지식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성경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 가는 즉 '실천함으로써 체득하는 진리' 를 말한다. 브루더호프 (Bruderhof) 공동체를 가보면 그들은 "우리의 삶이 바로 학교다" 라고 말한다. 공동체 삶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 학교이며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은 이론 중심의 세계관 교육이 아닌 체험적인 삶의 현장을 통한 기독교 세계관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그 삶의 체험의 현장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기독교가 세속 사회에 대항하여 기독
교 문화관과 세계관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속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세속 사회에 영향을 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믿음과 생활 체험을 공유한 공동체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