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주요한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표시'이다.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지 우선 그 일반적인 개념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the reign of God)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임박성에 따라 미래적 하나님 나라와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 구분된다.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장차 하늘 나라에 가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며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 땅에서 누릴 하나님 나라이다. 전자를 '종말론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하며 후자는 '천국의 현재적 개시'라고 표현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이미 도래하였지만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을까 하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공동체를 다루고자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어떠한 관계인가? 조지 래드(George Ladd)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이며, 교회는 그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의 공동체라고 보았다. 래드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 기관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자체는 아니지만 교회 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해 있고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도구이며 대리 기관(agent)이라는 것이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는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의 사신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화해의 뜻을 이루시는 최상의 수단이다."라고 정의하였다.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교회는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결과이며, 현재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고 있으며, 미래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둘째,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형태인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자.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인 천국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 나라는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계 21:1-5), 눈물과 고통과 죄와 사망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된 나라(계 21:4-5), 온갖 보석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영광이 휘황 찬란하게 빛나는 나라인 새 예루살렘(계 21:10-27),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가운데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왕 노릇(통치) 하는 나라(계 22:1-5)이다. 미래에 완성될 천국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서 새로운 영토(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회복(죄와 사망의 문제 해결), 새로운 통치(하나님과 영원히 왕 노릇 함)이다.
아름답고 권능 있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온 세상을 회복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즉 지금 여기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러 오셨다.
그러면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고(마 3:2; 막 1:1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요 3:1-5) 복음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다(눅 17:21).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나타난다(시 22:3).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기적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고(눅 11:20) 또한 어린아이 같은 겸손함과 단순한 믿음(마 18:1-5), 헌신과 충성, 낮아지고, 주고, 버려지는 섬김의 삶(마 19:13-30), 가난한 자와 나누는 공의의 삶(막 10:21-23; 눅 18:22-24), 온전한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천국의 헌장인 산상수훈(마 5-7장)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통하여 나타나는가를 총괄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지켜야 할 새 법으로서의 제자도이다. 그 제자도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를 가리킨다. 이 제자도는 인간으로서는 지키기가 매우 힘든 명령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졌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 초대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의 역사를 물리치는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었고, 또한 물질까지 온전히 나누어 가난한 자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었다. 제자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는 원수들에게 목숨까지 내놓는 순교의 자리까지 나아감으로써 예수님이 명하신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실천하였다.
이 제자도는 개인적으로 지키고자 할 때는 거의 불가능한 윤리 같지만 서로 선행을 격려하고 힘을 합하여 한 몸 안에서 공동체로 지키고자 할 때는 산상수훈이란 실천 가능한 윤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이다. 마태복음의 여덟 가지 복은 세상 사람들의 사회 가치와 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하나님 백성의 삶의 형태를 규정지어 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철저한 제자도라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형성된 '새로운 공동체'를 통하여 나타난다.
성령 강림 이전에는 주로 예수님 한 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것을 보여 주었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받은 사람들'의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보여졌다. 성령이 임함으로써 초대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기적을 베풀고 모든 물질을 온전히 나누어 능력과 사랑으로 충만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이기적인 인간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탐욕을 떨치고 물질까지 완전히 나눌 수 있는 지경까지 간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사의 혁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가 구현된 실체의 증거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통로라는 의미는 바로 그러한 능력과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즉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능력과 사랑이 충만한 온전한 공동체로 회복될 때 하나님 나라가 기존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 보여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2:28-31).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 4:12)"고 말했다.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보여 주는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임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 삶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곳에 임하게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가? 산상수훈을 실천하고 물질까지 전적으로 포기하고 나눌 수 있는 '철저한' 공동체여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을 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고 하신 예수님의 대답은 '철저한 제자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철저한 공동체의 모본이다.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은 재세례파 공동체인 후터 형제회(Hutterian Brethren)의 삶을 언급하면서 "산상수훈과 무조건적인 제자도, 제자도와 제자들의 공동체 생활, 형제 자매들의 공동체 생활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주와 구라파에 있는 후터 형제회를 방문해 보면 역시 몰트만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러한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후터 형제회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생활방식대로 재산을 공유하며 신실한 형제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로 지금도 초대교회 공동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전히 보여 주는 증거이다. 후터 형제회는 종교개혁 이래 현재까지 5백여 년 동안 존속해 왔다.
금세기의 위대한 인도 선교사였던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 박사는 인도 남부에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여사가 세운 도나버 공동체(Dohnaver Fellowship)에 대하여 "만일 이 지구상에 천국(the kingdom of God)이 있다면, 아마 그곳은 이곳 도나버 공동체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도나버 공동체는 사회 봉사와 함께 선교를 하는 공동체로서 힌두교 사원에 창녀로 팔려 간 소녀들을 교화시키는 사역을 했었다. 원래 CEZMS(영국성공회 제나나 선교회) 소속이던 이 선교단체는 자라면서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모든 회원들이 '모든 물건을 서로 공동소유(all things in common)'하며 '믿음의 선교(faith mission)' 방식을 취하는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외국에서 온 요원들과 인도 요원들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all one in Christ)'가 되었으며 계급이나 서열, 국적의 차이로 인한 차별이 없는 사랑과 포용의 분위기가 가득한 사랑의 공동체였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와 같은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정녕 하나님 나라의 삶이 구현된 실재를 접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은 여호와께서 영생의 복을 명하는 삶'이라고 노래했다(시 133:1-3). 그러한 사랑의 공동체 삶이 구현될 때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 선재(先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차 다가올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단편적으로나마 미리 이곳에서 맛보는 것이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라고 기도한다. 어떻게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는가? 철저한 제자도를 실천하는 공동체 생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통로이다. 공동체 생활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삶의 방식(life style)이다. 이것이 교회 됨의 의미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그리스도의 한 몸 됨을 실제로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실재(visible reality)'이며,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열린 창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공동체 생활, 즉 한곳에 모여 재산을 공유하며 사는 그러한 공동체 생활 형태만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임하는 통로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보편 교회의 형태와 삶 속에서도 그의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체험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철저성'이다. 보편 교회에서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나타나려면 제자도와 공동체성이 보다 '철저(radical)'하게 실천되어야 하며 보다 격상된 헌신이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의미는 단순히 함께 모여 사는 집단이 아니라 철저한 제자도와 깊은 형제애적 삶의 외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제자도는 물질까지 완전히 나누어 형제애적 사랑을 실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의 필요에 동참하여 더불어 함께 사는 실제적인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실천된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떠한 교회를 통하여 그 나라가 구현되는가? 교회의 본질이 실천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공동체 됨이었다. 개인주의는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없다. 참된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온전한 공동체는 이 땅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공동체성이 철저히 구현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다. 철저하지 않으면 처절하게 된다.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는 철저한 공동체의 실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하며, 미래에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미리 보여 주는 대안적 사회(alternative society)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절정은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나라는 이미 이 세상 안에 있으니 곧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된 그러한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하는 경우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영토(영역)'냐 혹은 '통치'냐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종래의 주장은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이 아니라 '통치'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앞서 미래에 새롭게 완성될 하나님 나라(천국)의 특징이 '새로운 영토, 새로운 회복, 새로운 통치'임을 살펴보았다.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이미 여기서 시작되었다면 미래의 세 가지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이 땅에서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치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장소적인 영역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은 하나님의 통치에 종점을 두었기에 하나님 나라의 영역적 의미보다 주권적 의미가 강하였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구체성이 결여된 막연한 개념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통치는 영역을 떠나서 이루어질 수 없다. 통치는 그것이 이루어질 때 구체적인 영역을 통해서 나타난다. 종래의 하나님 나라론이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너무 치중했었기에 통치의 영역인 공동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적 의미만 아니라 영역적인 의미에서도 균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장소적인 개념이 약화된 것은 종래의 신학적 영향도 있었다.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그의 교회론에서 하나님 나라의 구현에 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은 영적이며 비가시적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우리가 전 세계에 있는 온전한 기독교 공동체들과 그러한 공동체성을 온전히 지닌 교회들을 접해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만이 아니라 특정한 영역에도 가시적으로 임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란 개념은 너무 광범위하고 개념적이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도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막연한 관념적인 하나님 나라가 되기 십상이다. 진실로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도 임재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과 영역의 개념이 균등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할 때 균형잡힌 하나님 나라론이 확립될 것이다. 막연한 통치 개념으로서의 실재가 없는 하나님 나라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피터 쿠즈믹(Peter Kuzmic)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항상 이 땅 위에서 눈에 보이고 식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현대 교회의 비극 중의 하나는 현재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접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러한 경우에는 성경 해석이 대개 영해(靈解)되는 쪽으로 흐르거나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접해 보지 못했기에 관념적인 기독교로 정체되어 나중에는 체념적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다. 교회의 삶속에 하나님 나라가 보여져야 한다.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기독교는 체념적인 기독교로 전락한다.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성이 보다 실제적으로 가시적으로 철저하게 구현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하나님 나라가 임하며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오늘 여기에 나타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이다.
요즈음 기독교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연구와 하나님 나라 운동이 활발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오늘 여기서 이루어 갈 것인가에 대한 대안 제시에는 미약한 실정이다. 공동체의 삶은 기독교 세계관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이다.기독교 세계관은 일상적인 세계관과 달리 하나님 편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서 세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세계관 혹은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의 틀을 가진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뒤 저 세상에서 펼쳐지는 천국만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실제로 이루어지는 천국을 의미한다. 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 공동체 삶이다.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공동체는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도 밝혔듯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The community of the Kingdom of God) 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를 목표로 하며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 공동체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와 기독교 공동체는 모두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
그 동안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교회 내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 속에서 조명하여 확대해 나가게 하는데 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문제점은 학문적이고 사변적인 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기독교 세계관 책 저술, 강연, 세미나, 스터디 수준에 그치고 만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이 사회 전 영역을 다스린다면 그것이 옳음을 밝혀 내는 것만 아니라 그것이 실천 가능함을 실제 삶으로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론하는 기독교 세계관이 옳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이 그대로 실천될 수도 있지 않는가?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박식한 이론만을 말하고 실천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 이원론에 매여 있다. 삶과 괴리된 세계관 지식이 문제이다. 신약 성경의 구조를 묵상해 보면 왜 하나님이 바울을 예수님의 12제자 군에 미리 부르지 않고 나중에 부르셨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비교적 학문과 이론에 무식한 12제자들이 먼저 '행' 한 후에 그것을 바울이 나중에 학문적으로 정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먼저 "행하시고 가르치셨다."(행 1:1) 기독교 세계관이 어떠하다고 이론은 박식하게 늘어놓으면서 그 세계관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이원론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말'에 지친 종교가 되어 버렸다. 현대 교회의 비극은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를 확인하고 증명할 삶의 현장이 없다는 것이다. 예배시 수많은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지만 그 설교가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실천의 생활은 보기 힘들게 되고 선포된 말씀이 실제로 실천되지 않고, 또한 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말씀의 능력은 상실된다. 기독교의 지식은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 나감으로써 성경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알아 가는 즉 '실천함으로써 체득하는 진리' 를 말한다. 브루더호프 (Bruderhof) 공동체를 가보면 그들은 "우리의 삶이 바로 학교다" 라고 말한다. 공동체 삶 자체가 기독교 세계관 학교이며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
이제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은 이론 중심의 세계관 교육이 아닌 체험적인 삶의 현장을 통한 기독교 세계관 교육이 필요한 때이다. 그 삶의 체험의 현장이 바로 기독교 공동체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기독교가 세속 사회에 대항하여 기독
교 문화관과 세계관의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세속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세속 사회에 영향을 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은 믿음과 생활 체험을 공유한 공동체 생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