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Give the LORD no rest until he makes Jerusalem the object of praise throughout the earth.

이사야 62:7

 
작성일 : 12-12-20 16:42
(2)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독교세계관 운동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8,381  
교회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독교세계관 운동 (2)

                                                                      
                           김현진 목사 (사귐의 공동체 대표)
 
 
기독교 공동체를 통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

기독교 공동체 삶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생활속에서 실천 해 나갔던 예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하는 네 공동체는 필자가 직접 탐방하여 생활해 보았던 사례이다.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의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는 공동체를 통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범적 모델 중의 하나이다.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

1948년 미국 정통 장로교회로부터 유럽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던 쉐퍼는 1951년 가족과 함께 스위스 샹뻬리 지역으로 이사해서 산 속의 조그만 산장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였다. 그는 거기서 중대한 영적 갈등을 겪으면서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정립하고 유럽의 신학적, 사상적, 문화적 공허의 심각성을 안타까워하며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과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할 사명감을 가진다. 그는 미국 정통 장로교단의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재정적 후원도 끊었다. 1954년 그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자신의 집을 개방하여 모든 남녀들을 위한 '진리의 피난처' 로 바꿀 것을 결심한다.

그는 기도를 생활화했으며 다음의 네 가지 원칙을 세워 준수하였다. "첫째, 기부금을 요청하지 않고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만 아뢴다. 둘째, 간사를 모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한다. 셋째,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위하여 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고 그날 그날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 넷째, 우리의 사역을 알리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매우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실 것을 믿는다."

쉐퍼 부부는 엄청난 위험을 각오하였다. 1954년경에는 벌써 아시아와 중남미에서도 학생들이 몰려왔다. 1955년 2월에 그들은 스위스 연방 정부로부터 가톨릭 지역에서 개신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6주 이내에 스위스를 떠나라는 통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전은 모든 산꼭대기에 서리라(사 2: 3)" 는 말씀의 약속 아래, 기적적으로 그들을 도운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150여명이 보내 준 헌금으로 현재의 라브리 공동체의 모체가 된 웨이모의 멜레즈 산장을 구입하여 스위스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1955년 6월 4일 불어로 '피난처(L'abri)' 를 뜻하는 라브리 공동체 사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라브리에 오는 사람들의 반 이상이 불신자이다. 오전에는 개인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노동을 한다. 현재 세계 7개국에 라브리가 있는데 어느 곳이든지 라브리에 가면 간사중 한사람이 학생의 개인 교수가 되어 모든 문제를 도와준다. 개인 교수는 학생의 개인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연구 과정을 정하여 준다. 공부는 도서관에서 개인적인 연구를 하거나 담당 간사와 개인 공부를 한다. 라브리에는 미리 짜여진 교과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학생 개인의 관심과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연구 과정을 정한다. 라브리 도서관에는 오십여 권에 이르는 라브리 서적과 라브리 강연을 녹음한 이천여 개의 카세트 테이프 혹은 기타 여러 가지 라브리 자료를 중심으로 공부하게 되며 필요하면 언제든지 담당 간사와 공부나 그 밖에 어떤 문제라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오후 노동 시간에는 라브리 생활 운영에 필요한 노동을 한다. 스위스 라브리의 경우 겨울에는 매일 눈 치우기를 하며 그 외에 장작 패기, 채소밭 가꾸기 청소, 요리, 잡초 뽑기 등이 있다. 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하면서 개인적인 대화의 시간을 나누고 철학적인 문제와 성경의 기본 진리, 결혼 생활이나 이혼, 동성연애와 같은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가지고 자유롭게 토론하는 기회가 된다. 매주 목요일은 쉼의 날로서 여행도 하면서 자유롭게 활동한다. 저녁에는 주로 간사들이 인도하는 강좌가 주 2회씩 있는데 전문적인 주제에 대한 강의, 성경 공부 등이 있고 이외에 영화나 음악 세미나 등에 참석하여 함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눈다. 주1회 기도의 날로 정하여 중요한 문제를 두고 각자 자유로이 시간을 정해서 기도한다. 라브리 공동체의 간사 가족들은 큰집에서 가족들과 공동생활을 한다. 결혼한 간사이든지 미혼의 간사이든지 모두 공동체 내에서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 산다.

라브리는 일과 공부 그리고 삶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전 영역이 하나로 회복되었고 치유된 것을 믿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곳이다. 스위스 라브리 간사 엘리스 포터(Ellis Potter)는 "라브리 공동체는
예수 안에서 삶의 실재가 하나로 통합된 것을 실험하는 곳이다" 라고 말한다.
쉐퍼 박사가 유럽 선교사로 파송되어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그는 당시의 비관적인 신앙과 현실 앞에서 기독교의 신앙에 대하여 심각한 재고를 하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로 신학은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팽배해 있었으며, 사상적·문화적으로 공허해 있는 당시 유럽의 상태를 보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성경이 진리라면 어째서 기독교인들은 실천이 부족하며 교회는 생명력이 없고, 교회가 분열되며 대사회적으로 무기력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쉐퍼는 그러한 문제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영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그된 세계관으로부터 왜곡된 정치. 사회. 문화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그는 "사고가 행동을 규정한다" 고 하면서,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삶과 행동이 달라진다"고 한다. 그 바른 믿음의 대상은 바로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무오한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을 기초로 삼을 때 비로소 바른 영성(true spirituality)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라브리의 사역은 단지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변화된 삶' 에 관한 것이고 지성의 참된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전체성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명백히 한다.

라브리는 지식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라브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사물을 판단, 분석하고 세상을 통찰할 수 있는 '지혜' 이다. 그러한 지혜는 쉐퍼가 현실과 분리된 신학교나 대학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강의 한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개방하는 희생을 치르면서 손님을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이건, 무신론자건, 개신교인이건, 가톨릭이든, 보수주의자이건, 진보주의자이건, 배운 사람이건, 무식자이건 간에 마약중독자, 히피와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열린 공동체적인 삶을 통하여 실험되고 실천된 삶의 열매였다는 사실이다. 라브리는 단순한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배움터이다. 삶속에서 실험되는 않은 지식은 공허한 것이다. 라브리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한 개인에 의해서만 사역이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헌신되고 잘 훈련된 많은 간사들과 함께 라브리 사역이 수행되며 더불어 함께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적 삶의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신학의 문제는 바로 삶 속에서 실험되지 않고 실천되지 않은 신학이다.
쉐퍼와 라브리 공동체의 의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인격체로 믿고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메이첸의 정통보수 신학을 삶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입증한 것이다. 실천되지 않은 정통은 죽은 정통이다. 한국에도 신학이 삶의 전 영역에서 실험되는 라브리 공동체와 같은 신학교, 몸으로 신학을 사는 쉐퍼와 같은 신학교 교수들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베다니 공동체(Bethany Fellowship)

베다니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이상에 충실하고자 하여 물질을 완전히 공유하며 권능있는 선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자신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베다니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 나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직도 세계의 반 정도만 복음화 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선교인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일의 시급함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보다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우리의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43-47절과 4장 32-37절에 나오는 초대 교회를 이 시대에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오늘날 크리스챤의 삶을 사는 우리의 자발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이 일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지만 주께서 시작하신 것을 그가 완성하실 줄 우리는 믿는다. "

베다니 공동체는 1940년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성 누가 루터교회"에 다니던 5명의 집사들이 가정에서 세계 선교에 비전을 가진 성경공부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세계 선교를 위한 재정 충당을 위해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공동생활이 성숙해 감에 따라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더 큰 집이 필요했으므로 30여개의 방을 가진 큰 저택을 아주 헐값에 구입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 공동 생활과 함께 베다니 선교 훈련원(Bethany Missionary Training Center)을 시작해 선교사 후보생들을 모집해서 훈련시켰다.

계속 회원들이 늘어나자 다시 그 집을 팔고 미니에폴리스 교외로 이사해서 약 57에이커의 농장을 산 다음 2년 정도 농사와 목축을 하였다. 그후 한 회원의 제의로 자체 내에 공장을 지어서 기업을 경영하기로 하고 목각, 가구, 장난감, 스피커 시스템을 제조하였으며 1950-1981년까지는 캠핑 트레일러를 만들어 팔아서 큰 수익을 보았다. 그래서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고 자체 내에 더 많은 아파트와 시설을 확충하게 되었다.
 1981년의 오일 파동으로 캠핑 트레일러 제작을 중단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안도로 기독교 서적 출판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 출판물을 판매한 이익은 베다니 공동체 수익의 약 90%를 충당하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의 하루는 아침 6시 아침 기도로 시작된다. 아침 7시부터 7시 40분까지 식사시간에 이어 8시부터는 선교 신학생들의 오전 수업이 12시까지 이어진다. 일반 멤버들은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공동체 회원들의 자녀는 자체 내의 공동체 학교(Community School)에 다닌다. 이곳에는 유치원, 국민학교 과정이 있어서 공동체 가족중 아이들의 교육을 효율적으로 감당하고 있다. 오후 작업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아침에는 각자의 아파트에서 따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점심과 저녁은 반드시 다함께 공동 식당에서 해야 한다.
선교 신학교 학생들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 일반 공동체 회원들은 7개동의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정회원 모임이 있고 수요일엔 수요 예배, 주일에는 11시 대예배와 저녁 7시 찬양 예배가 있다. 이 공동체는 웬만한 단과대학 캠퍼스 넓이의 면적에 선교 신학교를 비롯해 학생 기숙사, 회원들의 아파트, 공동 식당, 체육관, 대규모 인쇄소 , 1천여 명을 수용하는 교회 등의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안에 공동체 가족 160여명과 선교신학교 학생
150여명을 합해 모두 300여명이 더불어 함께 사는 상당히 규모가 큰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내에는 선교 훈련원에서 발전된 선교 신학교(Bethany College Of Mission)가 있다. 학생들은 오전 4시간 동안 신학과 선교학을 공부하며, 오후 4시간은 노동을 하는데 노동은 노동학점으로 가산된다. 또한 학생들은 공동체 내의 출판사, 건축, 자동차 정비, 환경정리 등의 일을 하게 되며 학생들의 학비는 노동으로 대치된다. 학생들은 노동을 통해서 학과 시간에 배울 수 없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는 매우 실제적인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다 이 선교 신학교의 4학년의 과정을 마치면 1년간의 인턴쉽(Internship)이라는 선교 실습 과정을 가진다. 학생들은 베다니 선교회에서 파송한 세계의 선교 지부나 베다니 선교회와 연결된 선교 단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선교 현장 실습훈련을 받는다.
이 기간 동안에는 베다니의 재정후원 없이 믿음의 선교 방식이든지 지교회의 후원이든지 간에 학생 스스로 선교비 문제는 해결해 가면서 훈련에 임하게 되어 있다.

요즘 한국 신학교의 문제는 '학'은 있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 지식 중심의 신학교육과 교리 논쟁은 신학교의 생명력을 상실케 하고 신학생들은 체념적인 상태에 있다. 이러한 신학교의 현상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은 교회와 사회의 문제로 직결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생활은 이러한 '학' 중심적인 신학교 갱신의 새로운 희망과 비젼을 주는 모델이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학생들은 모두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되어 있으며, 기혼자일 경우는 반드시 부부가 함께 지원해야만 입학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학생들과 교수 그리고 공동체 가족들이 모두 기숙사와 아파트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는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예배하는 기쁨이 가득 차 있고, 능력있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과 신학 교육의 병존이 가능한 삶의 배움터이다. 이러한 공동체 생활과 선교신학교를 통해서 현재
3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권능있는 세계선교 사역을 펼치고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

미국 조오지아(Georgia)주에 아메리쿠스(Americus) 근교에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라는 공동체가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는 1942년 클래런스 조단 (Clarence Jordan)과 마틴 잉글랜드(Martin England)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 공동체이다. 원래 이 공동체의 이름은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이었다.
켄터키 루이빌의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헬라어 원어 연구로 신약학 부문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있던 클래런스 조단은 그의 신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면서 검증해 보기를 원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화해와 사랑의 십자가와 믿음의
실천이 가장 절실한 곳은 남부 흑인 지역이었다. 교수직을 그만둔 그는 흑인들만이 사는 농촌 지역인 조오지아주 섬터 카운티(Sumter County)를 택하여 그의 몇몇 동료들과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에 세웠던 목적은 두 가지 였다. 첫째로는 모든 이들로 더불어 화평케 하며 인종 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가난한 흑인들의 농촌을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실험해 볼 사역지로 백인이 전혀 살지 않는 가난한 농촌지역을 택하였던 것이다.
처음엔 400에이커의 땅을 사서 흑인들과 함께 살고 예배하며 일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농장에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여름 성경 학교, 청소년을 위
한 캠프 등 인근 지역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행사들을 열었다.

1968년 코이노니아 농장은 코이노니아 파트너스(Koinonia Partners)라고 개명하면서 그들의 목적을 재다짐하였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떠남으로 인류애를 상실하여 서로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코이노니아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대안
이 되는 삶(Alternative Life-style)을 계속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구체적으로 다음과같은 사역을 펼치고 있다.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사역(Low Cost Housing) : 농장 주위에 있는 가난한 흑인들의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했는데, 지난 20여년동안 170여채의 집을 인근 지역인 섬터 카운티에 지어주었다. 여기에서 해비타트 사역이 나왔다.
인근 주민을 위한 고용사역 : 코이노니아 농장의 땅콩 농사에 인근 주민을 고용해서 그들의 생계를 구체적으로 도운다.
어린이 양육 센터(Child Development Center) : 섬터 카운티의 아이들, 특히 학교에 가지 못해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가정에 내버려진 흑인 아이들을 돌보고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이 사역은 탁아소의 기능도 포함하여 생후 6개월에서 여섯살 까지의 아이들 35명을 맡고 있다.

청소년 사역(Youth Ministry) :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으로, 방과후 오후 세시경에서 다섯시까지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 사역의 목적은 그들에게 오후 시간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는 놀이와 교육 공간을 제공해 주며
인근 지역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리더쉽과 더불어 함께 사는 법을 교육한다.
목화판 성경(The Cotton Patch Version) : 남침레교 신학교에서 신약 성경의 헬라어 원어 연구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클래런스 조단은 촉망받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농장에서 흑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남부 흑인들의 정황에 맞는 새로운 성경 번역본을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복음의 본질과 신약성경의 본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신약 성경의 지명과 당시의 정황을 미국 남부의 흑인들, 즉 고통 당하는 소외층들의 용어로 번역본을 내었다.

1968년 코이노니아 농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밀라드 풀러 가족이 코이노니아 농장에 와서 살게 되었고 농장은 자선 기금을 만들어 인근의 빈곤층에게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 당시 밀라드 풀러는 자선 기금을 통한 저소득층 주택공급 사역에 동참하면서 큰 이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주택 사역이 코이노니아 농장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읍내 아메리쿠스의 빈곤층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도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1976년 코이노니아 동역회에서 나와서 별도로 '자선을 위한 헤비타트'(Habitat for Humanity)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빈곤층을 위한 주택공급 사역을 코이노니아 농장에서 15분 거리인 아메리쿠스에 본부를 두고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사역은 80년대에 들어서 전 미국으로 확산되었으며, 80년대 후반엔 전세계로 확산되어 국제 헤비타트 협회 (Habitat International)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현재 미국, 캐나다, 호주에 450개의 지회가 있으며 개발도상국 26개국에 80여개의 지계획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전대통령 지미 카터도 이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사실 '인류를 위한 처소 혹은 거처'라는 뜻으로 불리는 헤비타트 운동은 코이노니아의 '자선을 위한 기금(Fund for Humanity)'에서 나온 것이다. 코이노니아 농장의 창립자 클래런스 조단은 동역회로 전환한지 1년 후인 1969년에 급작스럽게 죽게 되었다. 신학박사였던 그가 약 30여년 동안 공동체의 기초를 닦느라 겪은 온갖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단박사는 열매를 보기도 전에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코이노니아 농장을 통하여 시작한 저소득층을 위한 섬타 카운티의 주택 사역은 오늘날 헤비타트 사역으로 발전되어 전세계로 확장되었으며, 필자도 한국 헤비타트 사역본부(사랑의 집짓기 운동)에서 사역하고 있다.
클래런스 조단이 복음의 본질을 실천하기 위해 희생과 헌신을 통해 한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었을 때 그 믿음의 열매는 생전에 그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이 정녕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이다.

예수원(Jesus Abbey)

예수원은 한국 및 한국교회의 쇄신과 세계 평화, 그리고 세계복음화를 위한 중보기도의 집으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 예수원은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정신으로 '십자가 지기'를 배우고 '받기보다는 주기'를 배우는 공동체다. 또한 공동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한 형제와 같이 진정한 '코이노니아' 를 나누는 곳이다.
설립자 대천덕 신부는 1957년 한국 선교사로 부름받아 성공회 미카엘 신학교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신학교 학생들에게 오후에는 노동을 하는 등 실험적인 커리큘럼을 운용하였으나 학생들의 반대로 교장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후 대천덕 신부는 1965년 예수원을 설립하였다. 대천덕신부 부부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로 옮기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며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 여부를 실험해 보는 실험실을 갖기 위해서였다. 대천덕신부는 "신앙은 과학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예수원 식구들은 기막힌 방법으로 지난 25년 동안 쓸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 받아왔다. 어떤 때는 그날 쓸 것을, 어떤 때는 일주일 단위로 필요한 것을 많지도 적지도 않을 양만큼 적당히 공급받는다. 또한 사도 바울의 자립정신을 본받아 그 동안 작물을 재배하고, 관목 숲을 쳐서 목초지로 만들어 젖소를 키우고,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일, 한 때는 양을 키워 옷을 짜고, 치이즈를 만들기도 했다. 주 수익 사업으로는 분수령 목장에서 양을 키워 나오는 양모로 양털 이불을 제작하여 주문 판매하고 있으며 목각 제품 제작, 도서 및 테이프 판매 등이 있다. 예수원의 경제는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한 노동과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하루 일과는 아침 5시 30분부터 6시 30분 아침기도, 조식, 오전, 오후로 각자의 분야에서 노동하며, 매일 12시에는 중보기도, 오후 1-2시, 밤10시 이후에는 침묵 시간, 주 2회의 성경공부 시간을 갖는다. 매주 저녁에는 월: 대신부님 강의, 화: 찬양에배, 수: 수요예배, 목: 은사의 밤, 금: 구역예배회, 토: 감사예배로 드린다.
예수원의 손님맞는 사역은 중요한 한 부분이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천사 대접하듯 하라'는 정신을 갖고 섬긴다. 요즈음에는 방문객이 매년 8000명에 달한다.

현대 도시와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산골짜기의 예수원 삶이 과소평가 되기 쉽다. 그러나 예수원을 통해서 대천덕 신부가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특별히 대천덕 신부의 사상은 한국교회에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 주었다. 대천덕신부는 성령론, 코이노니아의 신학, 희년 사상, 교회의 일치, 공동체, 기독교 대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천덕 신부는 한국에 '헨리 죠지'(Henry George)라는 경세 사상가와 함께 토지문제를 다루는 희년 사상을 한국교회 앞에 본격적으로 소개하여 보수 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경직된 성령론에 갇혀 있는 장로교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었고 한국 헨리 죠지협회(성토모), 가난한 자들의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인 헤비타트 운동(사랑의 집짓기 운동),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 전국 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전신공연) 등의 단체와 운동들을 낳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원 공동체는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제분야를 통해 한국교회가 신선한 기독교로 갱신케 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역할을 하였다.

대천덕 신부는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기만 하지 않고 공동체로 살면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그는 신학자이며 사상가이며 동시에 철저한 실천가이다. 그는 성경을 그대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보수주의자이나 그것을 실천하는 데는 매우 진보적이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대천덕신부를 가리켜 '그는 진정한 급진주의자'(real radicalist)라고 평했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신학적인 입장은 '근본적인 급진주의'(Fundamental Radicalism)이다. 현대 기술 문명과 정치를 철저히 해부하고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하여 현대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는 쟉크 엘룰(Jacque Ellul)의 사상 역시 근본적인 급진주의이다. 대천덕 신부와 마찬가지로 엘룰도 성경을 그대로 믿는 개혁주의 토대 위에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실천하는 삶'(radical life)만이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한다.
이미 타계했지만 20세기 최대의 지성인인 엘룰도 역시 프랑스 보르도에서 출감한 청소년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하면서 수많은 저술로 기독교 세계관 사역에 공헌하였다. 그의 예언자적인 지성의 메시지는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런 점에서 상통된다.
예수님이 제자훈련의 핵심 지침으로서 제자들에게 준 산상수훈은 '철저한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의 내용이며 이 철저한 제자도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이다. 공동체적 생활방식은 세속 사회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이며 그것은 대조 사회로서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 사회 사람들과 다른 점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A Way of Life)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대천덕신부는 "모든 기독교 대학들은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한 믿음과 기도

이상 기독교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실천해 나가는 경우들을 살펴보았다. 라브리는 열린 공동체 생활의 현장을 통해 쉐퍼 특유의 기독교 세계관 학교를 운용, 확대해 나갔다. 코이노니아 동역회의 클래런스 조단 박사는
가난한 흑인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사랑으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확대하였다. 그의 열매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의 망치 소리는 전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힘차게 울리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능력
있는 공동체 생활과 베다니 선교 신학교의 체재를 통해 오늘날 세계 선교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한국의 예수원은 공동체의 생활의 실험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변혁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 갱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기독교 공동체들의 공통점은 기독교 세계관을 생활 현장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천한 생활이다. 이론만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가질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기 위해서 미국의 베다니 선교 신학교와 같이 총체적인 공동체 삶속에서 학문을 하는 형태가 요구된다. 그러면 이러한 공동체들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단순한 믿음과 기도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세계관을 가졌다면 그 세계관을 실천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한 믿음과 출발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기독교 공동체들은 모두 단순한 믿음과 기도에서 시작되었다. 근래에 시작된 벤쿠버 세계관 대학원(VIEW)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이제 단순히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구체적 헌신으로 실천의 단계로 나아갔음을 보여주는 귀한 과정이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작업을 통하여 세계관 공동체가 진행될 것이다. 패트릭 존스톤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기본적인 사항이다. 기도없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기독교 세계관)은 이루어질 수 없다. 기도는 인간적인 노력의 차원을 신성한 것으로 끌어 올린다. 우리가 일할 때 우리가 일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러한 믿음과 기도 가운데서 소수의 인원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구성하여 그 삶의 현장을 가지고 유치원, 홈 스쿨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세계관을 오늘 여기서 직접 적용하며 살아갈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을 이루는 기독교 세계관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그 위에 그 동안 꿈꾸던 참된 기독교 대학이 설립될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편)